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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03 나의 모텔 예찬기-샤르망, 챠밍 샴푸 그리고 업소용 치약 (2)


미국 모텔에 관한 책을 읽다가, 문득, 모텔이라면 나도 좀 안다고, 떠들고 싶은 생각이 참을 수 없이 솟구쳤다. 한동안 수없이 출장을 다녀야 하기도 했고, 노루꼬리만큼 주는 휴가도 악착같이 나가 놀았기 때문에, 숙박 업소라면 나도 좀 안다. 정말 이런 데서 나 혼자 자야 한단 말인가, 안타까워서 침대를 치며 잤던 으리으리한 호텔들도 있었고, 오늘 밤을 과연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인가 걱정을 하며 잠을 잤던, 숙박 업체라고 할 수 없는 숙소들도 있었다. 


감옥을 개조해서 만든 호스텔에서도 자 봤고-샤워를 하고 났더니 신발 위에 파리가 30마리쯤 앉아 있었다-, 한여름밤 창문 없고 선풍기 없고 에어콘 없는 벌집 같은, 인도의 어느 시장통 구석의, 창문을 열면 소가 똥을 싸고 있는 호텔에서도 자 봤다. (최악의 숙소는, 기차역 안의 즉석사진 부스였다). 한편으로, 코넌 도일도 와서 주무시고 가셨다는, 창문을 열면 그림같은 호수가 보이는 호텔에서도 자 봤고, 전용 버틀러가 딸린, 특급열차의 마호가니 침대칸에서도 자 봤다. 

말하자면 이런.... 2008년 G8 정상회의 숙소였던 홋카이도 윈저 호텔. 창 밖이 러브레터다.


그러나 가장 많이 잔 곳은 어쩌고 저쩌고 '모텔'이었다. 어느 이른 봄날 출장길, '펜션'에서 한번 자 보겠다며 들어갔다가 밤새 불을 안 때 주는 바람에, 추위를 잊기 위해 밤늦도록 고스톱을 쳐야 했던 날 이후로 출장길엔 언제나, 모텔에 들어가서 잤다.


모텔만큼 좋은 곳은 없다. 24시간 문 열고, 따뜻한 물이 펑펑 나오고, 채널을 잘 돌리면 섹스 앤 시티도 나온다.
벌써 수년전인데, 지리산 자락의 어느 컴컴한 모텔에서 텔레비전을 켰더니 섹스 앤 시티가 나오고 있어서, 신기해했던 기억도 난다. 출장 때문에 수없이 모텔을 다니다 보니 어는 날 옆구리를 찌르며 "우리도 모텔.."하는 남편에게, 나는 너무 많이 가서 지겨워서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혼자 가라, 고 했던 적도 있다. 지방 출장을 갔다 급하게 기사를 보내라는 바람에, 근처 읍내 모텔로 들어가 반나절 끊고 기사도 보내고, 샤워도 하고, 컵라면을 먹었던 기억도 난다. 


모텔은 '오토모빌+호텔'인데, 유럽에는 많지 않은 미국형 숙소다. 땅이 넓다 보니 중간에 쉬어갈 숙소가 필요했고, 자동차로 이동하다 보니 주차가 되는 숙소가 필요했다. 'Super 8' 같은 곳이 대표적인 모텔 체인인데, 가격을 낮추기 위해 식당 대신 자판기를 두고, 각종 부대시설은 쏵 뺐다.


뭐, 각종 부대 시설을 다 뺐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모텔도 마찬가지긴 하다. '오토모빌+'호텔'의 취지와 좀 무관하게, 다른 용도로 적극 활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러다 보니 나름의 독특한 특색들을 갖고 있다. 보통 침대 뿐 아니라 동그란 침대, 물침대, 도대체 용도를 파악하기 힘든 ㄷ자 모양의 침대도 있다. 침대 아래 발 닿는 부분을 쏙 빼서 의자처럼 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거다. 3곳 중 1곳 정도는 매트리스에 비닐 커버를 씌워 놓는 것 같다. 빨간 등은 대체로 기본이고, 천장이나 벽면의 거울은 '옵션'이다. 


말하자면 이런 동그란 침대. 수건을 보니 '허니문 모텔'인데, 어디에 있는 건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따금 욕실 벽이 유리창으로 된 곳도 있는데, 불투명 유리지만 중간에는 투명 유리로 속이 들여다보이도록 한 곳들도 있다. 욕실에는 보통 샴푸와 보디샤워가 비치돼 있는데, 왜 항상 '샤르망'아니면 '차밍'인지 모르겠다. 같은 맥락에서, 모텔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료수는 '화이브 미나'라든가 '박키스' 같은 짝퉁들이 많다. 생수도 곧잘 들어 있는데 이미 개봉돼 물만 담아놓은 것이 많다. 요즘은 정수기가 딸린 모텔도 많은데, 커피 믹스, 녹차 티백과 플라스틱 컵도 곧잘 비치돼 있다.  



허니문 모텔에 비치된 챠밍 샴푸.


그러나 아무래도 모텔의 압권은 그, 참을 수 없이 조잡한 가구들이라 하겠다. 로코코풍의, 화려한 화장대나 침대가 곧잘 있지만 장식이랄게 인형의 집 수준인데다, 서랍도 다 장식이어서 열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낭만적인 분위기를 내겠다고 핑크색으로 도배를 해 놓았지만, 참으로 키치적인, 한국의 모텔은, 아아 사랑스러워.


어쨌거나 그 '미국의 모텔'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헌사. 
 
For all who have experienced 

lost reservations and bad directions,
lumpy matresses and broken ice machines,
burned-out light bulbs and those tiny bars of soap,
grimy towels, empty pools, paper-thin walls,
and forgotten wake-up call

딱 내 얘기다, 싶은 분들께

예약은 사라지고, '오시는 길'은 엉터리
침대는 쿨렁쿨렁 정수기는 역시 고장
불 안 오는 전구에, 쬐그만 비누 조각
너덜너덜한 타월, 텅 빈 수영장, 종잇장 같은 벽
그리고 절대 안 오는 모닝콜


Posted by orca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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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땡땡 2010.12.03 16: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눈물 없인 읽을 수 없는 스토리네요. 아이고 배야. ㅋㅋㅋㅋ

  2. 딸기 2010.12.06 17: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넘 재밌다.
    그런데 네 남편은 왜 모텔에 가자니? ㅋㅋㅋㅋㅋ

    http://ttalgi21.khan.kr/1796 이거 아니, 명랑모텔?
    http://ttalgi21.khan.kr/2196 요것도...
    http://ttalgi21.khan.kr/2199 요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