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장생포 가는 길 어느 공장 담벼락. 장생포초등학교 어린이들의 그림으로 벽화를 만들었다.)


불길한 영화의 시작처럼 이야기하자면, 그 하루가 그렇게 길 줄 알았더라면 아예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침부터 어딘가 이상했다. 고래 목시조사 배를 태워주겠다던 울산시청 박선생님은 전날 밤 전화통화에서, 아침 9시30분까지 장생포 냉동창고 뒤로 오라, 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정류장을 놓쳐 직업훈련소 종점까지 갔다가 터덜터덜 냉동창고로 향하는 길. 마침 갓길도 없어 차도의 흰 선을 밟으며 걸어야 했다. 찬바람 부는 냉동창고 앞에는, 배 한척 뿐 아무것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나 속은 거 아닐까. 이 배에 그대로 실려 새우잡이로 팔려가는 거 아닐까. 전화를 할까 말까. 5분만 더 기다려 볼까. 제자리에서 신발로 땅바닥을 쿡쿡 차며 동그라미 맴돌기를 10여분, 저쪽 가건물에서 손 흔드는 사람이 보였다. "배 타시기로 하신 분이시지요?"


정말 작은 배였다. 선장과 선원 2명, 박선생님, 그리고 나였다. 닻을 올리고, 줄을 감고, 시동을 걸고, 배는 천천히 장생포 미포산업단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다는 '장판' 처럼 평온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멀미가 쏟아진다기에 어젯밤 급히 사다 붙인 멀미약 자리가 괜히 머쓱할 정도였다. 좁은 만을 빠져나가자, 박 선생님은 의자를 세워 놓은 선실 위로 담요를 감고 올라갔다. 고래가 보이는지, 얼마나 보이는지, 어디서 보이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울산시청이 매주 실시하는 목시조사다. 파도가 몹시 거칠지만 않으면 매주 꾸역꾸역 나간다. 먼 바다에서 고래를 분간할 능력도 없고, 6인용 탁자 하나가 겨우 들어갈 선실에 일없이 앉아 있으니, 괜히 미안한 기분이었다.



(뻘쭘하게 앉아있는 접니다)

고래는, 소리없이 찾아왔다. 갑자기 배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바다 저 끝에 갈매기들이 무리를 지어 맴돌고 있었다. 그 아래 거뭇거뭇한 것이, 고래였다. 고래는 물고기를 쫓고, 고래가 먹고 남긴 물고기 부산물을 먹으러 새들이 모여든다. 새 떼 만큼이나 고래도 적지 않아 보였다.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그림자 같던 그것들은, 물 위로 펄쩍 펄쩍 뛰어 올랐다. 참돌고래였다. 한 두 마리가 아니었다. 세마리도 아니었다. 바다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참돌고래 떼가 덮고 있었다. 박선생님이 갑판으로 나오며 말했다. "운 좋네요, 오늘. 올해 들어서 처음 봅니다, 이렇게 많은 건." 


며칠 전 만난 정일근 시인이, 이야기를 하다 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고래 본 적 있어요? 아, 네. 얼마나 봤어요? 뭐 밍크도 좀 보고, 파일럿 고래도 본 적 있고, 오르카처럼 생긴 고래도 멀리서 보고, 또... 정시인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고래를 가장 많이 본 사람이에요. 울산 앞에 가면, 돌고래 떼가 수평선 저 끝까지 가득찰 때가 있어요. 수천, 수만마리에요. 고래 한가운데에 내가 있어요. 시간이 딱 정지하고, 고래하고 나만 있어요. 그 감동을, 나는 말로 다 못해요. 고래 보러 가세요. 봐야 압니다.




(똑딱이 디카로 찍은 넘실거리는 고래떼 동영상. 이거 올리려고 지금, 동영상편집기 다운받아 첨 편집(=잘라내기)해 올려봅니다 ㅠㅜ)


수평선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고래와 나 밖에 없었다. 고래들은 배를 무서워도 않고,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펄쩍 펄쩍 뛰어 올랐다. 배가 하얀 낫돌고래들은 카메라를 아는지 모르는지, 뱃전으로 다가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리고 또 뛰어올랐다. 카메라의 메모리는 금세 차 깜빡깜빡 빨간 불이 들어왔다. 지우고 찍고, 또 지우고 찍었다. 고래생태관광 가이드라인에는, 고래를 쫓아가지 마라, 고래 뒤에서 접근하지 마라, 피할 거리를 남겨둬라, 속도를 내지 마라, 같은 말들이 나오지만, 지킬 수도 없었다. 뒤로도 고래, 앞으로도 고래, 옆으로도 고래 떼였다. 



(뱃전에서 만져질 듯 가까이 다가오는 돌고래. 네, 가이드라인 따위는 완전 망각했다는 ㅠㅜ)


"관광선에 연락해 줘야지? 요새 못 봤대는데" 선장은 통신 연락망으로 고래바다여행선에, 여기 고래 있으니 관광객 태워서 오라, 고 연락을 보냈다. 울산시 남구청이 주말마다 고래관광선을 운영하는데, 한동안 고래가 보이지 않아 허탕을 쳤다. 평일인데도, 관광선은 곧 출발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 때까지 고래떼 잘 잡고 있으라는, 주문이었다. 고래는 GPS가 달려 있지 않아 위치를 확인할 수 없으나, 이 배는 찾을 수 있으니, 고래떼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 날의 끝나지 않는 항해가 시작된 것은. 


고래떼는 자꾸만 북으로, 북으로 이동했다. 우리도 따라서 북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금만 한 눈을 팔면, 고래떼는 사라지고 없었다. 고래떼를 따라, 배는 잰걸음으로 달렸다. 장생포에서 1시간 거리에서 목시조사를 할 예정이었는데, 배는 자꾸만 북으로 북으로 향했다. 이러다 월북하지 싶었다. 3시간 안에 장생포항으로 돌아온다고 했는데, 이미 4시간은 훌쩍 넘긴 상태였다. 선장은 어디론가 또 통신을 날렸다. 


한 시간쯤 더 달렸을까. 저 멀리서 검은 점이 보였다. 밥 배였다. 또다른 어업 지도선이, 고래를 좇고 있는 이 배를 위해 국과 찌개를 실어 왔다. 뱃전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밥을 먹으면서, 선원들은 교대로 고래떼를 지켰다. 밥 배가 돌아가고도 한 시간이 지나서야, 저 멀리 관광선이 보였다. 손을 흔들 필요도 없이, 관광선은 고래떼를 향해 달렸다. 관광객들의 환호가, 들리지 않는데도 들리는 것 같았다. 나도 타 봐서 안다. 관광객들은 고래를 보고 환호를 지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전 주,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밍크의 지느러미를 보기 위해, 관광객들은 배가 기울만큼 밍크를 향해 달려왔다. 저 멀리 푸른 바다에 불량화소처럼 찍혀 있는 밍크의 등을 보고도 관광객들은, 감탄과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거기가, 생태관광의 희망과 가능성이 있는 지점이다. 



(고래관광여행선의 관광객들. 그다지 환호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 환호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동해 한가운데서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 지금 달리면 터미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출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배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정신없이 고래떼를 좇던 어디쯤에선가, 밧줄이 스크류에 걸려 버린 모양이었다. 경운기처럼 털털거리면서 배는, 꾸역꾸역 서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이 대로라면 오늘 중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워 보였다. 나는 다시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파도에 넘실거리는 배의 진동은, 출근길 지하철 진동 만큼이나 규칙적이었다. 어느 순간 이미 졸고 있었다. 중간에 깨어 좀더 빠르다는 다른 배로 갈아타고, 다시 계속 졸았다. 내가 기자에 연구자인데, 무엇보다 이 배에 승선한 유일한 여성인데, 이렇게 머리를 기둥에 쳐박으며 졸아도 되는 것인가, 라는 자각이, 기둥에 머리를 박을 때마다 잠깐잠깐 들었으나 곧 사라졌다. 장생포에 도착할 즈음, 바다 건너편에 고래 해체장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사진을 찍으려 애썼던 기억이 얼핏 난다. 


배가 냉동창고로 돌아온 것은 오후 5시. 땅에 발을 딛자 파도를 넘는 것처럼 넘실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저 바다 한가운데에서,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고래떼 속에 있었는데. 그것은 꿈이었을까. 카메라를 켰다. 찍혀 있다. 그럼 사실이었을까. 아니 꿈이었을까. 가슴이 콩콩 뛰는데, 코에서 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데, 그럼 그건 사실이었을까. 



Posted by orca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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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쏘댕기자 2011.01.05 0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밤중에 뱃가죽 부여잡고, 킄킄킄

  2. 갈매 2011.01.05 14: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너무너무 재밌다~~ㅎㅎ
    론리플래닛 보면 각 여행지에서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아웃도어활동이 나오잖아. bird watching, whale watching 등등. 미국있을때, 보스턴 앞바다에 가면 고래를 볼 수 있다는거야.
    새따윈 관심없지만, '세상에 고래라니!!고래를 볼 수 있다니.'
    큰 기대를 품고 밤버스를 타고 보스턴항에 갔지. 비가 내려 그날은 꽝, 다음날도 비, 마지막날은 흐렸는데 갔더니, 이런날은 고래가 안보인다나. 허탕치고 실패. 고래는 그렇게 사라져갔지.
    근데 멀리갈 것도 없었군. 울산앞바다에 가면 저리 많은 걸.
    왜 한국에선 고래보러 갈 생각을 못했을까? 이래서 에코투어리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거겠지?
    9시뉴스로만 보던 돌고래떼 영상을 이렇게 최멍블로그에서보니 감회가 새로우면서, 나도 가면 막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착각이 든다! 감동의 포스팅임.^^

    그래 이렇게 각종 기술을 익혀가는거야! 대견, 뿌듯하다! 최멍~ (내가 얼마나 뿌듯해하는지, 이 바쁜 와중에, 장문의 댓글을 남긴 걸보니 알 수 있겠지?)ㅋㅋ ~잘했다, 치타!

    • 갈매 2011.01.07 1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SNS의 세계는 넓고도 깊다는. 만날 새로운 용어가 나오고, 개념이 나오고.. 어려워어려워~~
      어서 감기가 낫길 바래~~

      고래보러 갈 때 나도 좀 데려가주라~~ ^^

  3. ㅇㅇㅇㅇㅇ 2011.03.13 1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