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경남 진주에서 산악인 박정헌을 만난 적이 있다. 그가 벌이로 삼고 있는 노스페이스 진주점 주차장에서, 은행에 간 동료를 기다렸다. 그의 자동차 뒷좌석에는 조그만 책이 한권 놓여 있었는데, 그것이 우에무라 나오미의 <아내여, 나는 죽으러 간다>였다. 박정헌은 "제목이 이기 뭐꼬, 찝찝하게"라면서도 "아 진짜 대단해요, 결국은 매킨지에서 죽었는데, 진짜 탐험가라"라고, 문자 그대로, 고개를 흔들었다. "북극 돌아다니면서 물고기 잡아 묵고"라고 말할 때는 자기 팔뚝을 입으로 갖다대 뜯어먹는 시늉도 했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탐험가였지만, 존경하는 탐험가의 말인지라, 한번 읽어보리라 생각했다.

그주 주말, 교보문고 잠실점에 갔다가 그 책을 찾았다. 한참을 컴퓨터를 두드리던 안내원 언니가 미안한 얼굴로 "본점에 한권 있다는데 상태가 너무 나쁘다는데요"라고 말했다. 다음에 보지, 뭐. 손을 흔들어 냅두라고 하고, 대신 '데르수 우잘라'를 사 왔다. 시베리아 소수민족을 다룬 '샤먼의 코트'에서 남들 다 아는 세기의 고전으로 나왔던 책. 두번째 샀다. '시베리아 우수리 강변의 숲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나는, 출장 때 들고 갔다가 시베리아 반대편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 타운의 한 호텔 침대 옆에 두고 와 버렸다. 데르수 우잘라는 온몸에서 땀을 흘리고 있겠지.

며칠 뒤 대관령으로 개썰매 취재를 갔다. 캐나다 옐로나이프에서 개썰매 조련자(머셔) 훈련을 받고 돌아온, 우리나라 유일의 머셔 방병철씨를 만났다. (옐로나이프는 내가 어학연수지로 점찍어 놓은 지역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로라가 잘 보인다.) 대관령 칼바람에 저절로 말라버린 천연 황태를 안주삼아 뜯다 말고 방병철씨가 차 안에서 책을 한권 꺼내왔다. <안나여, 저기 코츠뷰우의 불빛이 보인다'>. 아마도 내가 걷기 시작할 때쯤 나왔을, 누렇게 책장이 뜬 책이었다. 방씨가 개썰매를 배우러 캐나다로 간다고 하자, 아는 산악인이 쥐어 주셨단다. "개썰매 끌고 북극권 1만2천킬로 간 이야기예요. 안나가 리더견 이름이고. 우에무라 나오미라고, 정말 대단해요."

우에무라 나오미? 그 우에무라 나오미였다. 일본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 5개대륙 최고봉 등정, 이어 그린란드 개썰매 횡단, 북극권 1만2천킬로 개썰매 주파, 북극점 도달. 매킨지 겨울철 단독 등정 뒤 하산길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 때가 43세. 마음은 언제나 히말라야 어디쯤의 자일에 매달아놓은, 영원한 탐험가였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사람을 일주일 간격으로 두명이나 추천하다니. 안타깝게도 '안나여 저기 코츠뷰우...'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헌책방 다니다가 구하시는 분은 삐삐쳐라) 우에무라 나오미의 유일한 책인 '아내여,...'는 마침 그 주 주말 들른 을지서적에서 구할 수 있었다. 자그마한 책이어서 코트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지하철과 버스에서 읽었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우에무라 나오미가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아내에게 쓴 편지 모음집. '아내여, 나는 죽으러 간다'는 선정적인 제목과 굳이 '세기의 모험가가 자신의 운명을 건 아내에게 행방불명에 이르기 전까지 써낸 생생한 육성 메시지!' '이 편지는 산에 홀렸더 남자가 사랑한 그의 아내에게 전하는 감미로운 사랑의 편지(!)' 라는 소개글을 책 표지에 써놓은 것을 보면, 뭔가 세기의 러브스토리로 포장하려 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럴 리가 있겠나. 움하하핫 (허리에 손을 얹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바른 자세로 정성들여 읽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뒤로 쫙 퍼지기 시작했다. 편지 내용은 일관적으로 이렇다. "사랑하는 당신, 잘있지? 여기 있으니 당신이 정말 보고 싶어. 텐트 구입비용 1200달러, 새 그물, 텐트 고정핀, 개사료비용 등이 필요해. 아, 참 내가 신세진 이런저런 부부들께도 이선물, 저선물 좀 보내드렸으면 좋겠어. 편지 좀 자주 쓰지. 잉잉잉. 얼른 집에 돌아가서 당신이 해주는 따뜻한 밥 먹고 싶어. 몸 조심해."

이거 뭐, 남동생이 예전 군대시절에 엄마에게 보내던 편지와 비슷하다. "엄마 잘 계시죠, 저도 잘 있어요, 몸이 힘드니 가족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리고 초코칩쿠키, 칸초, 수박, 통닭,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피자, 생크림케이크....등이 먹고 싶어요. 면회올 때 꼭 사오세요. 못난 자식이 제대하면 효도할게요."

함께 탐험을 떠나지 않은 이상, 남아있는 아내는 매니저가 된다. 긴급 연락책인 것이다. 대단한 사랑의 연서를 기대하지 말고, 한 편의 탐험 보고기로 읽어야 비로소 재미가 있다. 그러면 탐험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구체적이고 사소한 문제들이 팍팍 실감이 난다. 세기의 탐험가라고 해서 탐험 도중 인류의 미래와 지구의 현재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아내에게 "어제서야 겨우 개들의 허리 밴드 15개를 모두 만들었소. 그리고 오그라든 스웨터를 늘리는 뜨개질을 했는데, 한쪽 소매를 6센티 정도 떴소... 시간은 왜 그렇게 빨리 가는지!" "도쿄에 돌아가면 일본의 진미, 스 우동을 실컷 먹어야겠다!"라고 썼다. 우에무라 나오미에 이어 북극권을 무동력으로 일주한 마이크 혼은 '불가능의 정복'에서 '오줌 눌 때마다 얼어죽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썼었다.

세기의 탐험가들이 일기나 편지에서까지 위대하지는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탐험 이야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이런 거다. 그들 역시 나와 똑같은 불안과 외로움을 갖고 있다는 것. 라인홀트 메스너가 혼자 산에 오르기 전날 밤, 호텔 방에서 짐을 꾸리면서 울어줘서 너무 고맙다. 우에무라 나오미 역시 울기 일보 직전에 악을 쓰듯 썼다. "현재도 내일이 되면 과거가 되듯이, 앞으로 나흘 분밖에 남지 않은 식량도, 나 혼자 몰고 가는 개 썰매도 모두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일로 회상하게 될 것이오" 그러니 이 사소한 편지모음은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 탐험기인 것이다. 올해 세번째로, 별 다섯개.


Posted by orca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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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yungworry 2010.11.02 1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흐흐흑...왜들 저러고 사신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