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곰은 우리가 코르도바로 가는 길에 고래를 볼 수도 있다고 했다. 바다사자는 확실히 볼 것이고, 해달 정도는 여기저기서 불쑥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알래스카 위티어에서 코르도바로 가는 페리 안에서, 나는 포경선의 일등 항해사처럼 엄숙한 자세로 고래가 나타나는지 감시했다. 그러나 한 시간이 흐르고, 두 시간이 흐르고, 페리가 돌연 경로를 바꿔 발데즈에 들러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태우고 엉금엉금 코르도바로 가는 동안에도 고래는 나타나지 않았다. 탐조 망원경을 손에 들고 번갈아 불침번을 선 우리가 본 것은 부표 위에서 게으르게 일광욕하는 바다사자 두 마리가 전부였다.
생각난 김에 말해두자면, 바다사자는 물개와 비슷한 해양 포유류다. 물개보다 체격이 작고 영리해 동물원 물개 쇼에서 물개 대신 애쓰고 있다. 해달도 해양 포유류인데, 바다에 사는 수달이라 할 수 있다. 수달보다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귀엽다. 일본 애니메이션 <보노보노>에 나오는 하늘색 보노보노가 바로 해달이다. 코르도바 페리 터미널에는 아니나 다를까 해달 두 마리가 배영 자세로 둥둥 떠 있었다. 뭘 몰래 훔쳐 먹다 딱 걸린 듯한 얼굴을 하고, 해달들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생선을 먹었다. 이따금 우로 취침, 좌로 취침, 물 속으로 한바퀴씩 데구르르 구르기도 했다. 엄마 해달의 배 위에 누워 있던 아가 해달도 엄마와 함께 데구르르 굴렀다. 너무 귀여웠다!
(아구작 아구작 생선 갉아먹는 소리를 내며 배영하는 해달들)
해달은 코르도바의 상징적 동물이다
우리는 코르도바에서 트레킹으로 시간을 보냈다. 30층 아파트 높이에서 3분에 한 번 씩 우르르 쿵쾅 천둥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차일즈 빙하에 다가가 물수제비를 던지고, 도시락을 싸 들고 새들백 빙하로 피크닉도 갔다. 가지 끝마다 솜사탕 같은 이끼 뭉치를 매달고 있는 온대 우림의 나무들과 악수하며 걸어가다 보면 길 끝에 빙하와 호수가 나온다. 가이드북은 ‘집채’라고 했지만 실상은 ‘개 집’ 만한 빙산들이 호수에 떠 있었다. 빙하가 만들어 낸 호수의 가장자리에서 손수건을 깔고 앉아 우리는 샌드위치를 먹고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떼를 지어 여행하는 나무들을 봤다. 알래스카 내륙 평원의 가문비나무들이 유콘 강을 따라 베링해로 흘러 들어갔다, 해류를 타고 남으로 내려와 쿠퍼 강 삼각주에서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차일즈 빙하로 향하는 길은 그림엽서같이 아름답습니다)
‘여행하는 나무’는 동물학자 윌리엄 프루이트가 쓴 알래스카 자연 에세이 ‘와일드 하모니’의 첫 장 제목이기도 하다. 그는 1960년대 포인트 호프 인근에서 진행되던 핵실험 계획, 채리엇 프로젝트의 환경영향평가 담당자였다. 핵실험이 연약한 북극의 생태계를 한번에 날려 버릴 수 있다는 고민 끝에 그는 ‘양심선언’을 했고, 원주민들의 대규모 핵실험 반대 시위로 이어져 결국 채리엇 프로젝트는 저지된다. 그러나 프루이트는 미국 본토 대학에서의 자리를 잃고 떠돌다 캐나다 매니토바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역시 알래스카에 몸과 영혼을 묻은 일본인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는 그를 기려 ‘여행하는 나무’라는 에세이를 썼다. 부지런히 전세계를 걸어 다니고 있는 도보여행가 김남희씨도 ‘여행하는 나무’라는 이름의 홈페이지를 갖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travelingtree.com은 ‘여행하는 나무’에 매료된 누군가가 이미 사들이고 없다. 어쨌거나 나무들은 패키지로 여행하고 있었다. 외롭지 않아 보여 다행이었다.
(이끼가 카펫트처럼 푹신하게 깔린 트레킹 길)
우리는 아침엔 킬러 웨일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코르도바는 액손 발데즈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의식화’가 됐다. 순한 어부들이던 주민들은 연어와 해달의 떼죽음을 목격했고, 장화를 신고 기름을 걷어 냈으며, 액손사를 상대로 길고 오랜 싸움에 들어갔다. 1993년엔 액손사의 배가 어민들의 해상 시위로 코르도바로 입항하지 못하고 발데즈로 돌아가기도 했다. 주민 상당수는 아직도 액손사와 소송 중이다. 컬처 센터 한 귀퉁이에는 토템폴을 패러디한 ‘쉐임 폴 shale pole'을 전시하고 있었다. 액손사 부회장의 얼굴에서 기름이 잔뜩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거꾸로 새긴 조각이다. 알래스카 인디언 하이다 부족은 저주하는 사람의 얼굴을 거꾸로 토템폴에 새겨 넣었다고 한다.
(간판이 거꾸로 매달려 있어요. 자세히 보면 가로등에 해달이 그림도 매달려 있음)
‘
(커뮤니티 박물관에 전시된 액손 발데즈 기름 유출 사건 당시의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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